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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재모 중편연재소설] 에티오피아 용사와 보화고아원(제5편, 최종회)
시인작가/발행인 가재모  |  jaemoka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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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9  1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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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재모 중편연재소설] 에티오피아 용사와 보화고아원(제5편 최종회)

작가 가재모

[제5편 최종회]

필자가 5월 초부터 20일간에 좀 무리를해서 필자가베트남 참전병 중편소설 6 회 연재를 끝내고 2-3일 쉬고 있었다

처음 페이스북 멧신저로 자기 아버지가 임전무퇴의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 한국참전 제3차 대대병력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용감무쌍하게 매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던 워체포 테세마(Wochefo Tessema)이고 자기는 그의 아들 게나나우 워체포 (Genanaw Wochefo) 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게나나우 워체포는 Facebook 메신저로 나와 연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후 게나나우 워체포의 설명에 따르면 그때 필자가 쓴 베트남전 참전용사와 베트남 처녀와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중편소설을 1회부터 6회까지 한글을 아는 지인을 통해서 줄거리를 잘 읽었다 고 했다.

그러니 수고 하신 김에 한국전에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이야기와 자기 아버지, 워체포 테세마를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로 써 보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자료를 계속해서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게나나우 워체포는 1996년 9월2일 " I love Korea"라는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 연예클럽을 설립, 운영하면서 K-Pop 등 한류의 에티오피아 전파에 적극적 역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게나나우워체포는 에티오피아 시인이며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 My favor of my father','He is my father', 'Kamshahamnida'( 영어)로 낭송하고 노래로 불렀다.
 
또한 게나나우 워체포는 1952년 제2차 에티오피아 강뉴 파병대대의 중사로 전공을 세운 Sergeant 'Wolde Michail Abdi'의 딸인 'Tigest Wolde Abdi와 결혼, 슬하에 'Nuhamin Genanaw Wochefo'(12세)와 Liya Genanaw Wochefo'(7세)를 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국가보훈처에서 발행된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에티오피아”를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안성 맞춤으로 입수하게 되었다.

드디어 헌충일을 맞아 서 한국전에 참전, 백전백승의 무패 신화를 세웠던 강뉴(Kagnew) 부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을 회고하면서 1차로 “강류(Kagnew) 부대, 예카와 사랑의 보화고아원”을 2회 연재 방식으로 썼다

그 후 게나나우 워체포(Genanaw Wochefo)가 추가 자료를 보내와서 2차로 중편소설 “에티오피아 용사와 보화고아원”을 5회 연재식으로 이어서 쓰게 되었던 것이다.

   
임전무퇴의 강뉴부대 워체포 테세마 참전용사

워체포 테세마 용사는 전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내 YTN 특집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처참했던 전황과 격전지 백병전을 적나라하게 회고했다고 한다.

위체포 테세마가 YTN에서 행한 실제 장면은 “ 경례! 에티오피아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히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에티오피아 만세! 대한민국만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강뉴 부대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저는 그 전쟁에 참전한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참전용사들을 후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워체포 테세마는 한국전에 참전해서 10개의 각종 무공훈장을 유엔과 한국정부로부터 수여 받았다.

휴전후 귀국, 금의환향도 잠시, 7년 한발과 공산정권의 출현으로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

군 복무기간이 끝나자 워체포 테세마 가족은 황실에서 배분한 코리안 빌리지와 가까운 인근 아부아레(Abuare)에 위치한 아와테 비리지(Awate Village)로 이사하여 정착했다.
 
워체포 테세마는 미군 7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기 때문에 우연히 미군 법무관을 알게 되었다.
 
미 법무관도 영어도 잘하고 전쟁터마다 무공을 세우는 워체포 테세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미국의 소형 법전 좀 낡은 것으로 한 권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미법무관은 순순히 자기 부대에 있는 구형 법전 중 지금은 개정이 많이 이뤄져서 비 현행이라면서 두툼한 법전 한 권을 받게 되었다.
 
미법무관은 워세포 테세마에게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앞으로 에티오피아도 언젠가는 왕정체제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바뀔 것으로 전망되니 제대 후 법을 공부해서 판사나 변호사가 되라고 조언했다.
 
그런 영향으로 워체포 테세마는 당시 에티오피아 법무부에서 시행하는 법관 양성 훈련코스에 입소하여 소정의 과정을 수료하고 변호사 자격시험을 통과,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침에 신분이 일거에 수직 상승되었다.
 
이러한 그의 탁견이 후일 1962년 하일레 셀레시에 1세 국립대학교가 개교 이후 워체포 테세마는 법과 대학 과정을 수료하여 법학학사로서 정기코스를 마쳤다.
 
워체포 테세마는 황실 근위대 전역후 티오피아 말로 황제로 부터 부여받은 'Werda ' 로서 법률 전문가( Legal Expert), 변호사(Lawyer), 법무부 법무위탁자(Advocate Agent for Ministry of Justice로 봉직,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었다.
 
결국 그는 변호사의 꿈을 이뤘으나 멩기스투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굴레를 뒤집어 씌워 장장 17년동안 직장에서 강퇴시키고 변호사업에 족새를 채워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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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에 가담을 했으나 주체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다.

변호사협회를 조직하여 변호사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고 주로 어렵고 힘들고 억울한 소외계층의 인권변호사와 국선변호를 고집했다.

공산당 치하에서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판사직의 강퇴와 변호사업도 탄압이 자심하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말년 25년동안 전쟁 후유증으로 지병과 노환으로 인하여 많은 고생을 했으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공무원 연금으로 연명하다가 한 많은 세상과 작별했다.

2018년 5월9일에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워체포 테세마는 현모양처였던 부인 제위디투 킨디(Zewditu Kindi)와 함께 해로했다. 
그러나 부인 제위디티 킨디는 고혈압과 만성 천식( heavy asthma )으로 고생했지만 제때 만족스러운 치료를 받지 못했다.

6.25동란 당시 대한민국은 풍전등화, 위급존망지추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수호의 십자군으로서 생경한 한국 특유의 기후와 풍토, 공산침략에 용감무쌍하게 고귀한 목숨과 피를 흘려 방어했다.

전후 대한민국은 전쟁 복구과정에서도 유엔 회원국과 국제 사회로부터 물심양면으로 무한한 도움을 받아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원조 공여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019년, 6.25 한국전쟁 발발 제 69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 국민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한국전의 참상과 이 땅의 자유와 평화 수호를 위해 목숨과 피를 흘려 용전분투 했던 유엔군 참전 용사들께 새롭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위로와 감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결초보은을 다짐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전 파병의 결단을 내리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우방 국가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혈맹으로서 우의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결초보은, 結草報恩>

춘추시대 진(晉)나라 선공(선공) 때의 일이다.

위무자( 魏武子)에게는 애첩이 있었다.

어느 날 병석에 눕게 된 위무자(魏武子)는 아들 위과(魏颗)를 불러 자신이 죽으면 자기 애첩을 재가시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병세가 위독해진 위무자는 자신이 죽으면 애첩도 순장(殉葬), 즉 함께 묻으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기신 전혀 다른 두 유언 사이에서 고민하던 위과는 병이 위독할 때 했던 유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 결국 아버지 애첩을 순장(殉葬)하지 않고 개가 시켜 목숨을 살려줬다.

한편 세월이 흐른 후 이웃 진(秦)나라에서 진(晉)나라를 침략했을 때의 일이다.

보씨(輔氏) 지역 전투에 왕으로부터 출정 명을 받은 진(晉) 나라의 장수 위과(魏颗)와 진(秦)나라 괴력의 장수 두회(杜回)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을 하다가 결국 위과가 두회에게 다소 밀리는 형국이었다.

그때 갑자기 웬 백발 노인이 전장에 나타나 열심히 풀을 묶고 있었다.

한참을 싸우다 보니 진나라 두회 군졸들이 노인이 묶어 놓은 풀에 걸려 힘없이 넘어져 위과는 적을 섬멸하고 적장 두회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버렸다.

그날 밤 한 노인이 위과의 꿈속에 나타나 “나는 당신이 순장하지 않고 시집 보내 목숨을 살린 당신의 아버지 애첩의 친정 아버지요. 오늘 전장에 풀을 묶어 두회를 쓰러지게 해서 당신이 보여 준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결초보은은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입은 은혜를 갚지 않는 것을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하여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에티오피아의 코리안 빌리지>

에티오피아의 한국촌(Korean Village)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귀국한 후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위치는 위치는 아디스아바바 시내의 워레다(Woreda) 13지역 케벨레(Kebele)1) 6이며 이곳은 강뉴부대가 한국전에 파병되기 전 영국 교관에 의해 체계적인 실전훈련을 받았던 지역이다.

특히 한국전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용사들이 귀국 후 정착할 수 있도록 황제가 특별히 하사한 땅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 파병에 따른 국가 재정의 압박과 7년 가뭄으로 인하여 농축국가인 에티오피아는 빈국으로 추락하면서 코리안 빌리지도 쇠락의 운명을 걸었다.

   
 

1974년 군부 쿠테타로 멜기스투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셀라시에 황제는 왕좌에서 축출되자 코리아 빌리지는 하루 아침에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자유를 위해 공산군과 싸웠던 강뉴 부대 영웅들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반동분자들이 되어 핍박과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참전용사들은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땅도 몰수를 당하여 하루아침에 빈털털이가 되었다.

워체포 테세마도 공산정권에 의해 자산몰수를 당하고 어럽게 꿈을 이룬 판사직은 강퇴 당하고 변호사 자격도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딱지에 변호사 활동마저 족쇄가 채워졌다.

워체포 테세마는 공산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변호사협회를 조직하고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연합(EPRDF)에 가담, 후일에 대비했다.

이와 같이 황제의 각별한 은혜와 사랑을 받던 코리안 빌리지, 평안했던 마을이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을 당했다.

멩기스투 공산 정권 시기에는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어 한국에서 지원하기가 어려웠다.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된 이후 1994년 명성교회에서 의류 컨테이너 3개를 기증한 것을 비롯하여 한국촌의 도로 보수공사에 10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지원을 재개하였다.

한국촌에 있는 초등학교(Hibret Fire School)는 마을 주민 자녀의 교육을 위해 1963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하사한 대지에 학교를 지어 1966년 개교하였다.

한국은 한국촌 초등학교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 사업의 일환으로 총 3만 달러를 들여 1972년 교사 1개 동과 1974년 교사 2개 동을 건립하여 기증하였다.

2004년~2005년에는 총 80만 달러를 들여 교사를 개축, 건립하여 기증하였으며 각종 교육 기자재와 학용품을 전달하였다.

2010년 현재 재학생 1,300여 명 중 참전 용사 후손은 55명이다.

현재 아디스 아베바 최빈민가에는 한국의 1960년 초반 같은 낡은 함석지붕 아래 열악한 환경에서 약 4만여명의 주민이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서 5-6천명이 참전용사틀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강뉴 참전용사들은 모진 굴곡진 세월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새겨져 있다.

특히 자신들이 봉급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아 동두천의 보화고아원을 운영하며 친자식같이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던 원아들을 지금도 잊지를못하고 죽기전에 만나보기를 소원하고 있다.

   
강뉴 참전용사들이 봉급에서 십시일반 모금하여 운영했던 보화고야원

그들은 한국전에서 받은 무공훈장과 추억의 사진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보물처럼 자랑한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 당시 지상군을 파견한 혈맹국가로서 양국은 특별한 역사의 수뢰 바퀴, 양축으로 불가분의 운명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양국은 1963년 수교 이후 정치•경제/통상•개발협력 등 다방면에서 상호 신뢰와 우호에 입각한 돈독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주에티오피아 한국 대사의 설명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최초의 인간 루시가 발견된 인류의 요람이자, 남부에서는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을, 북부에서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찬란한 문화를 함께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국가라고 한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지배 경험이 아주 짧은 유일한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런 향기로운 커피 집산지다.

에티오피아는 지금은 비록 최빈국이지만, 동시에 가장 발전이 잠재력이 있는 개발도상국이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베바에 아프리카연합(AU) 및 유엔 아프리카경제위원회(UN ECA)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기구의 소재지로서, 아프리카 대륙의 정치외교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1억 5백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아프리카 제2의 대국으로서 엄청난 성장잠재력을 지닌 에티오피아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GDP성장률을 기록해오고 있다.

나아가 2025년경 중견국가 반열의 등극을 국가 목표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이 과정에서 한국을 경제 발전의 모델로 설정하고, 한국 기업의 국내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양국 간 협력관계는 진일보로 발전되고 확대,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하여 양국은 경제 및 개발 분야 등 기존 협력관계를 심화시키고 민간 및 문화교류의 활성화 등 새로운 분야에서의 협력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제5편 최종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작가 가재모 장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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