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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재모 중편연재소설] 에티오피아 용사와 보화고아원(제4편)
시인/발행인 가재모  |  jaemoka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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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7  2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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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재모 중편연재소설] 에티오피아 용사와 보화고아원(제4편)

작가 가재모

[제4편]

1953년 7월 27일 동족상잔의 참혹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남북을 갈라 놓았던 38선 대신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드디어 정전을 맞았다.

정전 후 에티오피아 강뉴대대는 연천과 동두천 지역에 주둔하면서 철원 지역의 휴전선 경비를 담당 하였다.

특히 동두천에 설립해서 부대원들이 십시일반, 자비량으로 운영해 왔던 보화고아원에 수용된 60-70명 수준의 한국 전쟁 고아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물심양면으로 돌보는 고아원 지원 사업을 계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54년 제4차로 강뉴부대 교체가 이뤄졌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한국의 정전 이후에도 한국의 휴전선 경비 임무를 위하여 계속 병력을 파견하였다.

 제 4차 대대 교체는 54년 6월 30일 인천항으로 도착했고 7월 10일 금화지역에서 정식 부대 교대식을 가졌다.

   
 

워체포 테세마가 소속된 제3차 강뉴 대대 병력은 교대식이 끝나면서 곧바로 인천항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워체포 테세마는 그 동안 친자식 처럼 각별한 사랑으로 돌보아 줬던 보화고아원의 김한송과 작별을 나누면서 많은 눈물을 뿌리고 후일을 기약하고는 헤어졌다.

웨체포 텔세마가 소속된 강뉴 제3대대는 인천항을 출발,  21일간의 긴 항해 끝에 꿈속에서도 그리던 정든 조국의 산천과 초목,  보고 싶었던 얼굴, 듣고 싶었던 가족을  만났다.

일단 임무 완수와 전쟁터에서 무사귀환을 환영하는 행사와 유해로 돌아온 전몰장병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희비가 엇갈린 행사가 끝나고 가족과의 상봉이 이뤄졌다.

워체포 테세마는 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전쟁터에서 천우신조로 살아서 돌아온 아들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등을 오른손으로 토닥거렸다.

어머니가 자리를 금새 양보하자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인 제우디투 켄디( Zewditu Kendi)를 품에 덥석 안았다.                             

출정식 때 죽지 않고 꼭 살아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켜준 애인이 너무나 대견하고 감사해서 곱게 화장한 얼굴은 금새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당시 고국으로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하이레셀라시에 황제의 각별한 배려로 아디스아베바 외곽에 위치한  코리안 빌리지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황제는 금의환향한 강뉴 장병들에게 매월 생활비를 지급하여 안정적인 삶을 누리도록 배려했다.

좋은 일자리도 개인의 희망과 능력을 감안해서 적극적으로 알선해줬다.

또한 농사도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1헥타씩 하사했다.

군 복무기간이 끝나자  워체포 테세마 가족은 황실에서 배분한 코리안 빌리지로  이주했다.

워체포 테세마는 미군 7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기 때문에 우연히 미군 법무관을 알게 되었다.

미 법무관도 영어도 잘하고 전쟁터마다 무공을 세우는 워체포 테세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미국의 소형 법전 좀 낡은 것으로  한 권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미법무관은 순순히  자기 부대에 있는 구형 법전 중 지금은 개정이 많이 이뤄져서 비 현행이라면서 두툼한 법전 한 권을  받게 되었다.

미법무관은 워세포 테세마에게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앞으로 에티오피아도 언젠가는 왕정체제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바뀔 것으로 전망되니 제대 후 법을 공부해서 판사나 변호사가 되라고 조언했다.

그런 영향으로 워체포 테세마는 당시 에티오피아 군법무관 시험을 꾸준히 준비하여 드디어 군법무관시험에 합격의 영광을안았다.

그리하여 황실 근위대 법무관으로 특채, 하루 아침에 신분이 일거에 수직 상승되었다.

이러한 그의 탁견이 후일 1962년 하일레 셀레시에 1세 국립대학교가 개교 이후 워체포 테세마는 법과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여 법학석사가 되었다.

워체포 테세마는 황실 근위대 전역후 지방 법원 판사로 정식으로 임용되어 법관으로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었다.

결국 그는 법관과 변호사의 꿈을 이뤘으나 멩기스투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굴레를 뒤집어 씌워 장장 17년동안 판사직을 강퇴시키고 변호사업에 족새를 채워 방해했다.

   
 

한편, 강뉴 제4차 파병 대대 역시 한국 주둔 기간 중 동두천 보화고아원의 한국 전쟁고아원 후원 사업을 계속 하였다.

1955년 강뉴 제 5차 교대 대대는 기존의 대대병력 편성에서 중대병력으로 축소된 규모로 1955년 6월 28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5차 중대는 금화지역에서 7월 9일 정식 부대 교대식을 가졌고 휴전선 경비 업무를 수행했다.

강뉴중대는 후방에 주둔 시 전 대대에서 인계 인수를 받은 보화고아원을 운영하며 한국의 전쟁 고아를 계속적으로 돌보았다.

강뉴 중대는 드디어 1956년 3월 연락 장교단을 남기고 부대가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 나라 중에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했던 나라이고 고유 문자가 있는 문명국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용사들은 조국을 위한 것도 아니고, 가족을 위한 것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결사 항전했고 고귀한 생명을 초개같이 버렸다.

<에티오피아의 7년가뭄>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부터 농업과 목축업으로 살아가던 에티오피아에서는 7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근래에 들어 서는 세계적인 가뭄현상은 온실효과, 엘니뇨현상 등으로 세계 도처에서 종래와 다른 양상의 가뭄이 발생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저수지 등 관개기반 시설이 미약했고 치산치수의 국가 역량이 부족한 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가뭄의 기준은 강수량이 예년 강수량의 10∼20% 정도로 극히 미미하고, 강수(일강수량이 0.1㎜ 미만인 경우)가 최소한 1개월 이상 이어지는 일기를 가뭄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한다.

에티오피는 1953년부터 가뭄이 시작,  장장  7년간 계속되어 식수가 부족하고 저수지 바닥이 쩍쩍 갈라졌고 농작물이 완전히 말라 죽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저수지 등 수리기반 시설이 열악한 상태여서 무방비로 당한 자연재해였다.

초지가 메말라 가축이 뜯어 먹을 들풀이 없어지자  가축들이 메말라 죽었다.

마실 물이 떨어지고 생계수단이었던 가축이 죽자 아기들에게  먹일 우유 마저 떨어졌다.

식량부족으로 영양실조와 기아자가 많아져서 심한 해는 연간 무려 1백만명이 넘었다.

구약 성경 예레미아  애가 4장, 멸망후의 예루살렘 편에서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젖먹이가 목 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었고,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줄 사람이 없도다.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에 앉았도다.  이전에 빛난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 에서나 알아 볼 사람이 없도다.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를 삶아 먹었도다.”라고 가뭄과 나라의 패망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말로만 듣던 에티오피아의 7년 대한은 이렇게 끔찍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가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가뭄 전에 에티오피아는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넘었던 아프리카의 중진국이었다.

혹독한 가뭄 탓에 국가경제와 민생이 일거에 갑자기 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도적이 사방에서 창궐했고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존경과 추앙을 받던 황제가 7년 가뭄에  속수무책으로  대처를 못하자 황제의 무능을 지탄하는 원성이 드높아졌다.

드디어 1974년 군부 구테타로 공산 군부가 세라시에 황제를 축출하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임시군사행정위원회를 설치하여 통치했다.

과격한 군사정부는 1975년 사회주의체제로 변환, 주요산업, 금융기관, 토지 및 자산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원들은 귀국하신 뒤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용감무쌍하게 싸웠지만 이들은 공산통치가 시작되자 하루아침에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공산당 통치하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전쟁터에서 고귀한 목숨과 바꾼 훈장을 팔아 근근이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강뉴 부대원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려고 피를 흘렸음에도 그게 멍에가 돼 평생을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강뉴 부대원들은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몰수하고, 일하고 있던 직장에서 강제로 퇴출을 당했다.

파병 병사들은 물론 가족과 자녀까지 차별하고 빈곤한 환경으로 내몰렸다.

핍박을 견디지 못한 파병 병사들은 파병 사실과 이름을 숨기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빈곤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1977년 2월 멩기스투 중령이 군사위원장에 취임하고 미군사고문단이 철수하고 소련과 쿠바 등이 군사원조를 시작했다.

에티오피아는 1987년 6월 총선거를 실시 했고 9월12일 인민민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를 선포했다.

또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멩기스투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4~91년간 멩기스투 공산정권은 친북한  일변도로 대외외교 정책과  국가체제를 운용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과 혈맹 관계였던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원,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가족들은 공산 치하에서  핍박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처참한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6.25 참전 용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에티오피아, 그 에티오피아에서도 더욱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1991년 5월28일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이끄는 인민혁명민주전선(EPRD)군이 공산정권을 몰아내고 아디스아베바에 입성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에티오피아 임시정부는 1991년 7월, 의회를 구성하고 2년의 과도정부 집권을 의결했다.

에티오피아 의회는 1991년 7월22일 멜레스를 과도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헌법을 채택했다.

멜레스 정부는 1993년 헌법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해  4월23일-25간 에리트리아 독립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 독립지지의 국민 여망에 따라 1993년 5월24일 에리트리아 독립이 선포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95년 5월 총선을 실시  멜레스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인민혁명민주전선이 압승하여 1995년 8월22일  현재의 에티오피아연방민주공화국이 출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제2의 6.25를 살고 있다.

[제5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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