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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재모 중편소설] 강뉴(Kagnew)부대, 예카와 사랑의 보화고아원(제1편)
시인/발행인 가재모  |  jaemoka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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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7  15: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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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재모의 중편소설, "강뉴부대, 예카와 사랑의 보화고아원"

가재모

[제1편]


시인 가재모 장로는 1953년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 제3진으로 참전, 강원도 화천 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무공을 세웠던 워체포 테세마(Wochefo Tessema)가 전후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YTN에서 행한 증언을 지인(이상욱님)으로부터 우연히 입수하게 되었다.
또한 부부 시인인 제가 작년부터 단편과 중편 16편을 써오다가 지난 5월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 중편을 페이스북에서 6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 소설의 애독자였고 워체포 테세마의 아들이며 " I love Korea"라는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 연예클럽을 설립, 운영하고 있는 게나나우 워체포(Genanaw Wochefo)로부터 관련자료와 사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서 발행된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에티오피아”를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입수, 헌충일을 맞아 한국전에 참전하여 백전백승의 무패 신화를 세웠던 강뉴(Kagnew)부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을 새삼 추억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 경례! 에티오피아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히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에티오피아 만세! 대한민국만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강뉴 부대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저는 그 전쟁에 참전한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참전용사들을 후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국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송홍(宋弘)이라는 사람은 정직하고 온후한 품성으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광무제가 미망인이고 손위 누이인 호양 공주가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송홍에게 은밀히 의중을 떠봤다.
그러나 송홍의 대답은 비록 황제의 면전이었지만 의외로 단호히 거절했다.
“ 아닙니다. 가난하고 비천을 같이했을 때 사귀던 친구일수록 잊어서는 안되며 (貧賤之交不可忘), 조강을 먹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 왔던 아내일수록 부귀하게 되어도 버리지 않고 집에 두어 사랑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糟糠之妻不下堂)”라고 거절했다.
그리하여 광무제도 누이의 중매를 포기했다는 고사다.
가난하고 비천할 때 사귄 친구를 후일 출제를 했더라도 잊지 말고 술을 거르고 남은 조강 지게미를 보리 고개시절에 하도 먹을 것이 없어 밥 대신 먹으며 함께 고생한 처를 부귀하게 되었다 해서 그 아내를 내치지 말라는 고사성어다.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은 북한군의 6.25남침을 당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무이하게 전투부대를 한국에 파병한 국가다.
에티오피아는 대한민국을 구하는데 크게 기여한 혈맹의 형제국이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음에도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해주고 계신 참전용사들을 대한민국과 국민은 영원히 기억하고 보은해야 한다.
에티오피아는 라이베리아와 함께 1884년 유럽 열강들의 베를린 회담에서 살아남은 아프리카의 몇 안되는 독립 국가들 중 하나였다.
189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기 위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1896년 아두와(Adwa) 전투에서 참패로 끝났다.
식민지 개척의 후발 주자였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눈독을 드렸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에티오피아는 320만년 전 가장 오래된 인류화석 '루시'가 발견된 나라로 현존하는 모든 인류의 발원지이다.
아프리카 동쪽에 위치한 나라로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고유문자를 가진 나라이다.
또한 아라비카 커피(Arabica coffee)의 원산지이자 아프리카 최대 커피 생산국이다.1889년 에티오피아 제국의 요한네스 4세가 사망하고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탈리아는 메넬리크 2세와 우치알리 조약을 체결하고 그 조약에 따라 에티오피
아를 보호국으로 해석하여 1890년 1월에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에 메넬리크 2세는 그 조약을 배격하여 1893년 9월에 조약 자체를 거부하며 이탈리아와 전투 체제로 돌입했다.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총독이던 바라티에리 장군은 이탈리아 정예 산악병들을 비롯해 약 2만5000명의 병력이 있었다.
이에 맞서 에티오피아는 8만 명에 가까운 병사를 소집했다.
그러나 2만5000명의 충성스러운 근위대를 제외하고는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구시대적 군대였다.
처음부터 바라티에리 사령관은 에티오피아군이 군대 규모와 훈련 수준, 군 장비 면에서 이탈리아군의 적수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자만했다.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이탈리아군 바라티에리 사령관은 오합지졸인 에티오피아군의 취약점을 예단하고 , 지구전 전략을 택했다.
이탈리아 군사령관의 예측대로 전투 없이 대치한 3개월이 지나자 에티오피아군 8만의 식량조달과 농민군의 강제증발에 따른 심각한 내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896년 3월 1일, 바라티에리 사령관 역시 본국의 압박과 내부의 불만이 인계 점에 이르자 전황을 타개하고자 선제 공격에 나서기로 결심, 공격을 승인했다.
그날 자정을 기해 전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군이 진을 치고 있는 아두와(Adwa)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바라티에리는 4개 여단으로 재편했다. 알베르톤(Albertone) 장군의 현지인 여단은 좌측을 맡고, 아리몽디(Arimondi) 여단은 중앙을, 다보르미다(Dabormida) 여단에게는 우측을 맡겼다. 마지막 여단은 Elena 준장에게 맡겨 사령관과 함께 예비대로 중앙 후위를 담당하게 했다.
1896년 3월1 이른 새벽부터 적진을 향해 진군하며 좌측을 맡은 알베르톤 여단이 원래 작전 명령상에 배치될 고지를 지나쳐 에티오피아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 적전노출의 중차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3월 1일 아침, 황제 메네릭 2세는 전황을 보고 받고 즉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알베르톤 여단의 진격로 앞, 뒤를 차단한 후 공격을 개시한다.
아침 6시부터 시작된 양측의 교전에서 에티오피아군은 두 시간만에 알베르톤 여단을 포위, 완전히 궤멸시켰다.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후미에 있던 아리몽디 여단을 향해 허겁지겁 후퇴해야 했다.
폭풍처럼 패잔병들을 쫒아온 에티오피아군은 연달아 아리몽디 여단을 덮쳤다.
<아리몽디 여단의 강력한 화력>
하지만 알베르톤 여단과 달리 고지에 이미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아리몽디 여단은 에티오피아군에게 강력한 포화를 퍼부었다.
이티오피아군의 수적 우세는 이탈리아 군대가 산 위로부터 퍼부어대는 강력한 화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점차 높아졌다.
패배를 예감한 메네릭 2세는 마지막 승부수로 비밀병기였던 황실 근위대 2만 5천명을 모조리 아리몽디 여단 진지 총공격에 투입했다.
<황실근위대 전격투입, 전세 역전>
전격 투입된 황실 근위부대는 성난 이리떼처럼 아리몽디 여단 진지를 휩쓸었다.
유리한 고지도, 월등한 화력도 그들의 맹렬한 기세를 꺽지 못했고 아리몽디 여단 역시 처참한 패배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뒷편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바라티에리 사령관은 우측에 있던 다보르미다 여단에게 아리몽디 여단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아리몽디 여단이 결국 궤멸되자 다보르미다 여단은 서둘러 후퇴를 결정한다.
<다보르미다 여단의 실수>
부실한 지도에 의존했던 다보르미다 준장은 실수로 부대를 좁은 협곡으로 이끌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곡으로 쏟아져 들어온 에티오피아의 8천 기마병들은 그들을 처참히 도륙했다.
(다보르미다 여단의 최후)
이 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7천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당했으며 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승전한 에티오피아 군의 피해 역시 5천명이 사망했으며 8천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이탈리아 진영에서 싸우다 에티오피아군에 잡힌 현지인 포로 800명은 배신자에 대한 처벌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당해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다.
아드와(Adwa)전투에서 막강한 강대군인 이탈리아의 처절한 패배에 모든 유럽 국가들이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이탈리아 국민들은 예기치 못한 참패에 경악, 분노, 충격파가 전국을 휩쓸었다.
전국에서 일어난 군중 시위로 당시 이탈리아 수상이 3월 9일 사임했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수치스럽게도 에티오피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이 Adwa 전투 결과는 이탈리아 는 더 강성한 나라 강대한 군대를 요구하게 만들었고 결국 무솔리니의 파시즘 권력의 등장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셀라시에 황제가 다스리는 왕조국가였다.
에티오피아는 호시탐탐 재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탈리아의 위협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재위 기간1930~1974)는 즉위하자마자 1931년 헌법을 만들고 노예제도를 폐지시키고 국민의 의무교육을 확대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펴 초창기에는 아프리카에서 발군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주의 확장 정책을 펼치기 위한 구실을 찾던 중 1934년 12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접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삼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빈약한 장비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에티오피아군을 밀어붙여 1936년 4월 9일 아샹기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이 수도 아디스아바바까지 점령하자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국외로 망명하고 이탈리아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언하고 바돌리오를 총독으로하여금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을 수립했다.
황제는 이탈리아가 침공하는 동안 UN의 전신였던 국제연맹과 주변국가에 도와달라는 호소를 했지만 고립무원이었다.
그러던 중 2차대전이 터지고 1941년 영국이 에티오피아를 해방 시키며 황제는 다시 에티오피아로 돌아왔고 종전 후에 UN이 창설되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에서 집단안보체제를 주창했다.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생기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도와줘야 한다" 라 는 요지의 연설을 했고 결국 유엔에서 받아 들여지면서 집단안보체제로 태동하게 되었다.
북한군의 불의의 남침이 있던 바로 다음날 UN은 즉시 비상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에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공동행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UN결의에 호응한 16개국가가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5개국가 의료지원단을 보내 한국을 지원했다.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는 군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젊은이들을 모아 황실근위대를 만들었다.,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유엔 결의를 따라 강류부대를 꾸려 지구 반대편으로 보냈다.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 소속 자원병 중심으로 파병부대를 결성한 뒤 부대 명칭을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격파하라'는 의미의 '강뉴'로 명명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한반도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고 당부했다.
강뉴 부대는 에티오피아 최정예 부대인 황제 직속 근위 1사단 소속에서 병력들을 모아 1개 대대로 구성됐는데 대원 모두가 자원자들로 구성됐다.
에티오피아 처럼 룩셈부르크 라는 작은 소국도 한국을 위해서 전투 병력을 파병했다. 자신들도 자유를 잃었을 때의 고통과 대가를 뼈아프게 체험했기 때문에 파병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영국군으로부터 철저한 훈련을 받고1951년 4월13일 1진은 출정식을 치르고 4월14일 한국으로 파병됨으로써 그들의 백전백승의 전설적 불패 신화가 시작 됐다.
세라시에 황제는 강류 부대 한국파병 발대식에서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하고 있는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라는 이 신성한 세계정책을 실현하고 보호하기 위해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Fight until you win, or die)라고 천명했다.
강류 부대 1진은 21일간의 항해를 거쳐 5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미 7사단 32연대 예하 대대로 배정받아 그들은 전선에 투입되자 마자 공산군들을 박살 냈다.
강류부대는 제1진 1122명의 파병에 이어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6년 3월까지 5차에 걸쳐 6,037명을 파병했다.
5진까지 미군의 대형 함정을 타고 태국, 필리핀을 거쳐 3주일 만에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들 3진까지는 2개월간의 미군에 의한 적응훈련을 거쳐서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에티오피아군은 난생 처음 느끼는 한반도의 살을 에는 듯한 혹한과 쌓인 눈 때문에 고생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곧 그들의 임전무퇴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미군이나 국군은 공산군은 기습과 백병전에서 고전했지만 강뉴부대는 압도적인 적의 숫자에도 침착하게 차근차근 적들을 박살냈어 에티오피아 친위대는 전투에서 황제가 명했던 "이길때까지 싸워라"라는 명령을 지켰다.
그들은 단장의 능선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전투를 하며 한국전쟁 기간동안 253전 253승이라는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웠다.
특히 1952년 10월 금화지구에서 일어난 중부전선 최대의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 (철원, 평강, 김화)전투에서 21간 이어진 소위 358고지, 472고지, 요케진지 전투. 독산리 전투 등 수십배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오자 미 포병부대에 진내 포격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요청하며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을 몰아냈어 1개중대가 중공군 수 백병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미7사단장이었던 아더 트루도는 에티오피아군의 용맹함과 백전불패의 전과에 찬사를 보냈다.
강뉴부대는 부대가 위험하면 간부들이 먼저 선봉에서 돌격해 포위를 뚫었고 아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그냥 두고 떠나지 않았다.
전우가 포로로 잡히면 끝까지 추적해 구출해내기도 했다.
그들은 황제의 "이기거나 죽을 때까지 싸워라" 명령을 절대적으로 지켰던 군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일부는 전쟁수당을 받으면 본국으로 보내지 않고 전쟁 고아들이 모여 사는 보화원에 돈을 내주었던 천사들이기도 했다.
1956년 마지막 강뉴 5진 부대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6037명이 한국을 위해 싸웠고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
특히 휴전후에는 UN 국제아동긴급기금, 교회세계 봉사단 등을 통해 전후 복구에 기여하며 단계적인 철수를 통해 1956년 까지 한반도의 안정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제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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